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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한국일보]“미혼모 혼자 아닌 우리” 유쾌한 싱글맘을 위하여!2019.02.092023-12-20 16:32
작성자 Level 10

편견 맞서 온 미혼모가족협회 내달 출범 10년

쓰라린 아픔 위로하며 연대… 미혼부 모임도 등장

혼자가 아니다. 고통의 곁에 서고, 다시 그 곁을 단단하게 지탱하는 손들이 있다. 김도경(왼쪽 두 번째) 한국미혼모가족협회 대표, 오영나(가운데)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대표, 양 단체 활동가들은 다짐한다. 미혼모가 부당한 편견에 시달리지 않는 사회, 유쾌 발랄한 자신을 펼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겠다고. 배우한 기자

# “아이 출생신고를 하러 주민센터에 갔는데 공무원이 대뜸 말해요. 왜 애비 없는 자식을 낳아서 나랏돈으로 키우려 드냐고. 다른 주민 분이 ‘애를 키워보겠다는 사람한테 공무원이 어쩜 이럴 수 있냐’고 시청에 민원을 넣은 뒤에야 그분이 절 찾아와 사과했죠.”

생명에 대한 책임을 방기한 건 아기의 친부였다. 난데없는 훈계를 들어야 했던 건 홀로 아이를 책임지겠다고 나선 엄마였지만. 숱하게 당한 손가락질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조차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런데도 ‘내가 이런 취급을 받아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의지할 사람들을 만나고, ‘내 잘못이 아니라’는 걸 공부하고, 함께 손잡고 차별에 맞서기 전까진. 9년 차 미혼모이자 한국미혼모가족협회(이하 한미협) 상담팀장으로 일하며 내담자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는 정수진씨의 얘기다.

# “혼자 어떻게 애를 키우려고 그러냐” “결국엔 다 포기한다” “나중에 결심하면 입양 보내기도 더 힘들다” 뱃속 아이를 지키기 위해 들어온 이곳이 과연 미혼모 시설이 맞나. 수시로 이런 생각이 스치도록 입양 종용은 끈질겼다. “네가 키우면 실패할 것”이라는 사례는 끝도 없이 나열됐다.

“그동안 어떻게 열심히 살아왔는지는 관심도 없었어요. 그저 임신했고, 애 아빠가 애를 포기하려고 했다는 그 사실만으로 육아에 실패할, 모자란 존재 취급이 시작된 거죠. 분명 아주 불우한 어린 시절을 겪었을 것이라는 식으로요. 끝까지 전 내가 직접 잘 키워내야겠다고 다짐했지만요.” 미혼모를 향한 세간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각종 행사를 기획하고 동분서주하는 한미협 운영위원장이자 고교생 딸의 엄마 김미선씨의 기억이다.

누구보다 잘 알기에, 고통의 곁에 선 이들이 있다. 스스로 통과해 온 상처에 이제 막 고통받기 시작한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기댈 어깨를 내어준다. 편견, 차별, 비난 때문에 고립되기 일쑤였던 미혼모들의 연대가 뜨겁다. 한미협은 참다못한 엄마들이 직접 나서 편견에 맞서 싸워 온 미혼모 당사자 단체다. 최근엔 이들의 의리에 감복해 이를 닮은 미혼부 단체를 구성하기 시작한 ‘아품’(세상에서 제일 좋은 아빠의 품)의 아빠들까지 나타났다.

한미협 활동은 미혼모 지원 안내, 인식개선 활동, 전국 네트워크 구성, 쉼터 제공 등을 망라한다. 생계를 유지하기도, 아이를 키우기도 어느 하나 쉬운 일이 없지만 협회 활동에까지 팔을 걷고 나선 건, 내가 당한 차별이 부당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편견 없는 세상에서 사는 내일을 꿈꾸기 때문이다. 결국엔 아이들이 차별받지 않고 이 사회에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날을 희망하기 때문이다.

최근 만난 한미협 김도경 대표는 협회가 구성되고 2009년 7월 개설된 온라인 카페 ‘미스 맘마미아’를 통해 첫 오프라인 모임에 참석했을 때의 기억을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당시는 그가 한참 예쁠 두 돌 아기를 두고도 심적 고통에 빠져있을 때다. 아이에 대한 책임도, 수억 원 빚에 대한 책임도 저버린 아이 아빠가 떠난 상황을 차근히 혼자 통과해내고 있었으니 당연했다.

“제 이름으로 남기고 가버린 빚이 몇억 됐거든요. 저도 친구 만나는 것도 좋아하고, 돈 쓰는 것도 좋아하던 사람인데 홀로 아이 키우고 틈틈이 돈 벌고 빚을 갚아 나가고 누구한텐 힘들단 얘기도 못 하니, 참 말도 못하게 힘들고 우울하기도 했죠. 비슷한 친구들을 만나 마음을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에 한 카페를 찾았는데 ‘유쾌 발랄한 싱글맘을 위해’라는 문구가 마음에 꽂히더라고요. 서로 너무 위하는 것도 느껴지고, 그렇게 스스로 위로하며 강해지기 시작했어요.”

기억도 생생한 첫 모임은 단출했지만 뜨거웠다. 20~25명의 엄마가 물 한 잔, 과자 몇 개를 두고 마주 앉았는데, 서울시한부모가족지원센터 강당의 대관 시간이 다 끝나가도록 ‘상봉’의 감격은 그칠 줄 몰랐다. “처음 만났는데도 할 말이 너무 많고 감격스럽고, 눈물 나게 반갑더라고요. 어디 가서도 하지 못했던 말들, 고민을 나누려니. 그 이후엔 거기에서 만난 엄마들 집에 서로 찾아가 이 집에서 하루, 저 집에서 하루 얼굴 보며 이야기를 쏟아냈어요.”


당시를 회고하는 것만으로도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 김 대표는 “그때 임신했던 분들의 아이들이 지금 초등학교 2학년, 3학년”이라며 “반가워 서로 미친 사람처럼 붙들고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라고 했다. 한국미혼모가족협회란 이름에는 각 미혼모 가정도 엄마와 아이로 구성된 ‘완전한 가족’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김 대표는 설명했다.

초기에는 사무실이 없던 협회가 서울 종로구 광화문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KUMSN) 사무실의 책상 한 칸을 빌려 사용하던 것을 시작으로 본격 틀을 갖췄다. 마침 KUMSN은 2년 전 문을 연 상태였다. 입양기관을 후원하러 방한했다가, 상당수 미혼모가 입양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리처드 보아스 박사의 후원 덕이었다.

김 대표는 “미혼모 당사자 단체가 출범하는 걸 달갑게 생각하지 않는 단체나 사람들도 있었고 모두 우리를 환영했던 건 아니었다”고 했다. “미혼모가 되는 순간 이 사람이 그전까지 어떤 공부를 했고, 어떤 사회 활동을 해왔고, 어떤 세상을 이끌어 왔는지 중요하지 않아요. 다 그냥 똑같이 대상화되거든요. 취업 연계 프로그램만 해도 수준이 엄청 낮아요. 미혼모라고 해도 학력도, 가진 전문성도, 원하는 진로도 모두 다르다는 생각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아요.”

어렵사리 출범한 협회가 무엇보다 ‘미혼모 인식개선’ 활동에 가장 공을 들이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달가운 시선만 있진 않았지만,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한국미혼모지원네트워크, 뿌리의 집 등 관련 단체에서 지속적으로 지지를 보냈고, 생산적인 논의들이 이뤄졌다. 상담 시스템이 갖춰졌고, 각종 인식개선 사업들이 설계됐고, 입양 특례법 개정에도 참여했다.

여성문화이론연구소의 활동가 양성 프로그램 등을 통해, 처음엔 그저 손잡고 웃고 울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행복해했던 회원들도 활동과 공부를 거듭하며 단단한 활동가로 거듭났다. 2017년 2대 대표로 취임한 김 대표 자신부터가 그런 경우다.

“홀로 2, 3명 몫을 하는 여행사를 운영하면서 아이가 일곱 살이 될 때까지 혼자 수 억 빚을 다 갚아 나갔어요. 그걸 다 해내고 나니 맥이 풀리면서, 한편으론 공부에 대한 갈증으로 마음이 가득 차더라고요. 맘껏 공부하고 마음에 뭔가를 채워 넣고 싶었는데, 여러 공부를 해나갈수록 내가 가장 어려울 때 도움을 준 이 단체에 이제는 나도 보탬이 돼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 대표, 정 팀장, 김 운영위원장 등 여덟 명의 활동가가 전국을 누비며 미혼모 자조 모임을 조직하고 진행하고, 인식개선을 위한 각종 강연에도 나선다. 협회는 2011년부터 14개 지역 공무원을 대상으로 반편견교육을 시작했다.

김 대표는 “미혼모들이 출생신고 등 때문에 아이를 낳고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이 공무원인데, 이 과정에서부터 험한 말을 듣고 차별과 편견에 노출되기 일쑤”라며 “심지어 관련 정책의 내용조차 모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지원이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탓에, 정작 곤경에 처한 미혼모가 나와도 어디에서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체계적으로 설명해 줄 주체가 없는 것도 문제다. 보다 못한 한미협이 직접 나서 미혼모전국네트워크를 구성하고, 전국의 정부 거점 기관들과 업무협약을 맺어 왔다. “도움이 필요하다고 요청이 와도 어디에서 어떤 지원을 받을 수 있는지 매번 이리저리 수소문해야 해요. 정부 차원의 정비가 필요한데, 지역에 당사자 네트워크와 기관들과의 업무협약을 통해 적절한 지원이 이뤄질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습니다.”

2010년부터 매년 20~30회씩 연 ‘휴먼 라이브러리’ 강연도 인식 개선에 크게 기여하는 활동이다. 활동가들이 연사로 나서 자신의 삶을 들려준다. 한 권의 책을 읽고 내용을 파악하듯, 한 편의 삶을 듣고 타인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게 하는 강연이다. 내용을 다 읽기 전에는 책을 판단하지 말고, 삶을 다 알기 전에는 남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라는 취지다.

바로 며칠 전에도 휴먼 라이브러리 무대에 섰다는 정 팀장은 “생각보다 많은 청중이 ‘미혼모가 이렇게 아이를 원하는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하는지 처음 알았다’고 말하곤 한다”며 “사회복지학 전공자들조차 미혼모들은 다 자신의 삶을 추구하고, 기록도 원치 않고, 아이를 베이비박스에 버리고 싶어하는 존재인 줄로만 생각했다는 말을 들을 때면 인식 개선의 갈길이 멀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정수진 팀장은 "휴먼 라이브러리 강연을 진행하고 쏟아지는 질문에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답을 하고 나면 뿌듯함이 밀려 오곤 한다"며 "의외로 많은 분들이 '미혼모가 얼마나 아이 양육을 원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김혜영 기자

몇 시간씩 삶의 이력을 풀어내고 질문에 답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인식 개선뿐 아니라 활동가 자신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높이는 데도 도움이 된다. “엄마들에게는 스스로 상처를 드러내는 일이어서 어려울 것 같지만, 결과적으로 내가 겪은 일과 가치관을 정리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계획도 하게 되고 생각이 정리돼요. 처음엔 ‘결국 네가 즐긴 결과 아니냐’는 식의 질문만 받아도 말문이 막혔는데 지금은 달라요. ‘아빠는? 즐긴 아빠는 책임을 안 지고, 난 졌는데. 난 책임을 다한 사람이야’ 하고요.”(정 팀장)

협회가 마련한 쉼터 ‘희터’에서는 거주가 불안정한 사각지대 미혼모들이 거주하며 안정을 찾는다. 한미협을 도와 온 지원단체 KUMSN의 오영나 대표는 “준비 없는 상태에서 임신 사실을 알게 되면 아무래도 부모로부터 지지를 받기 어렵다거나 직장을 잃게 되는 등 여러 불안정 요인이 겹겹이 닥칠 수밖에 없다”라며 “이렇게 한순간 고립되고 궁지에 몰릴 수 있는 미혼모들에게 당사자 단체는 서로의 존재만으로도 큰 위안이 된다”고 평가했다. 이어 “나아가 제도개선, 정책제안을 위한 활동을 적극 펼치는 중”이라고 보탰다. KUMSN 역시 긴급 위기, 의료, 주거 지원 등의 사업을 편다.

김 대표의 우선 목표는 “대표로 있는 동안엔 협회가 재정적으로 튼튼해질 기반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포부 덕에 정작 자신의 사업은 “개점휴업 상태로 뒀다”며 웃었다. 더 궁극적인 목표는 미혼모들이, 그 가정의 아이들이 낙인과 배제를 벗어나 살아가도록 인식을 개선하는 일이다. 3월 30일에는 10주년 기념행사도 연다.

“미혼모가 늘어나는 건 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현상이죠. 주체적 여성들이 늘어날수록 미혼모는 늘어날 거예요. 당사자들이 더욱 결속해 한국 사회에서 미혼으로 아이를 키우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해야죠. 우리 사회 어디에 살더라도 지역에서 뿌리내리도록 지원해야죠.”

한국미혼모가족협회 김도경(왼쪽 두번째) 대표와 활동가들이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출신의 변화순(가운데) 팸라이프가족연구소장을 찾아 자가분석 심리수업을 받고 있다. 변 소장은 “고통의 당사자이자 이웃들의 지지자인 당사자단체 활동가들이 보다 단단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신을 제대로 알고 사회가 요구하는 비합리적 신념, 편견을 직시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혜영 기자

이런 모습에 힘을 얻어 또 다른 연대를 꿈꾸는 이들도 있다. ‘사랑이 아빠’로 알려진 김지환(미혼부, 여성가족부 정책자문위원)씨다. 미혼부 단체 ‘아품’의 출범을 준비 중인 그는 “단순히 우리끼리 소모임이나 해보자 생각했던 것을 김도경 대표 등 주변에서 작은 비영리단체라도 출범시켜보라고 용기를 줘 일을 시작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다른 미혼부들의 출생신고를 도운 일을 계기로 6, 7명의 미혼부와 연락을 유지하며 사비로 도움이 필요한 미혼부 가정을 돕는다. 지금은 자조 모임 수준이지만 비영리단체와 공동육아시설을 설립하는 게 목표다.

김씨가 아이와 단둘이 남겨진 건 2013년 7월이었다. 아이를 거부했던 아이 엄마가 출생 신고도 하지 못하고 둘을 떠나버린 뒤라 아이는 주민등록번호도, 받을 수 있는 지원도, 건강보험도 없었다. 심지어 엄마의 정보가 없는 출생신고는 소송을 거쳐야 했다. 그 사이 산소호흡기를 찬 채 2주간 병원에 입원했던 아이의 값비싼 병원비를 대기 위해선 차, 노트북, TV까지 내다 팔아야 했다. ‘돈 좀 만졌던’ 김씨가 신용불량자가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2달이었다. 그런데도 아이를 돌볼 사람은 자신이 유일했기에 돈을 벌러 갈 수도 없었다.

아이가 유모차를 탈 수 있게 된 뒤론 마사지숍의 카운터, 지하철 택배, 식당일 등 닥치는 대로 일을 했지만, 아이의 존재를 부담스러워했던 업주들은 3개월을 못 버텨 해고를 통보했다. 고시원 생활, 구걸 등을 거쳐 출생신고 소송을 마무리짓고 나서야 비로소 지칠 대로 지친 자신이 들여다보였다. 그의 사연이 알려지며 2015년 가족관계의 등록 등에 관한 법률이 개정되는, 이른바 ‘사랑이법’ 시행이 이뤄지기도 했다. 아이 생모의 구체 인적 사항을 모르더라도 유전자 검사서 등을 가정법원에 제출하면 출생신고가 가능하도록 소송 절차가 다소 간소해진 것이다.

‘사랑이 아빠’로 알려진 김지환씨가 인천시의회 앞에서 한부모 가족 예산 삭감에 반대하는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그는 “여러 편견과 위기에 노출되기 쉬운 한부모 가정의 자녀들이 안정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보다 체계적인 지원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지환씨 제공

김씨는 “비슷한 아빠들을 보면 심리적 상처, 우울로부터 쉽게 헤어나오질 못한다”라며 “허심탄회하게 대화라도 해야 아이들을 위한 변화의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싶다”고 했다. “사실 한부모 가정 안에서 이혼, 사별, 미혼을 굳이 나누고 엄마와 아빠를 나눌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조금씩 처한 상황이나 어려움이 다르긴 하거든요. 무엇보다 아이 출생신고도 하지 못하고 소송을 진행 중인 아빠들의 상황은 겪어보기 전엔 상상하기 힘들어요.”

자신만 해도 아이가 난민 같았다. “아이가 열이 나면 보통 부모들은 일단 응급실로 달려가죠. 그런데 한두 번 가봤더니 건강보험이 안 되고 병원비는 너무 비싸고, 혼자 아이 돌보느라 벌이는 한계가 있다고 해보세요. 분윳값, 기저귓값 걱정하는데 병원비 무서워서 애가 아픈데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또 자괴감에 빠지죠. 내가 키우는 게 과연 아이를 위하는 걸까 싶어 수만 가지 생각을 했죠. 이럴 때 손잡아 줄 사람이 절실합니다.”

아품의 조직을 통해 연대가 단단해지길 바란다는 김씨의 목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의 증거를 찾는 일이다. “이제 막 말문이 트인 딸이 그 작은 머리로 얼마나 궁금해할지를 자주 생각해요. 어린이집에서 친구한테 ‘넌 엄마가 머리도 안 묶어 줬어?’라는 말을 들을 때 무슨 생각을 할까요. 이런 상처를 스스로 잘 이겨낼 수 있도록, 그 안에서도 베푸는 아이로 자랄 수 있도록, 다른 가족들과 연대 속에서 함께 고민하고 연구하고 보여주고 싶어요. 이미 이 삶을 겪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헤쳐나갈 때, 점점 더 그 실마리도 명확해질 수 있겠죠.”

▲한국미혼모가족협회 상담 및 후원 문의: http://www.kumfa.kr (02)2682-3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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